커뮤니티

귀소헌 일기

조선왕릉(朝鮮王陵)이야기
  • 작성일시 :2017-07-06 07:18 조회수 :1,026
.조선왕릉(朝鮮王陵)이야기


릉(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합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의엄마인데 후궁인분의 무덤은 원(園)이라 부르구요. 일반 왕족의 무덤은 그냥 묘(墓) 입니다.
조선왕조의 왕실무덤은 총 119기인데 그중에 릉(陵)이 42기고 이 중 2기는 개성에 있어 남한에 있는 40기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입니다.원(園)이13기 나머지는 묘(墓) 한왕조(조선왕조 518년) 왕들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전해져 오는 경우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하네요.
하지만 왕이라하여 다 왕릉에 서 것은 아니구요 10대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은 폐위 되어 왕의 신분이 아니어서 일반 묘(墓)에 안장된 서글픈 역사도 있습니다.
능(陵)의 위치는 4대문 10리 밖의 80리 이내(왕의 행렬이 하루만에 도착할 수 있는)에 위치를 하는게 일반적이라 합니다. 물론 세종의 영릉은 여주에 정조릉은 화성, 비운의 단종의 능은 강원도 영월에 있기도 합니다.

왕릉을 들어서면 크게 진입공간 재향공간과 능침공간으로 나눠요.
일단 입구에 들어서면 제실이 보입니다.
여기서 부터 진입 공간이에요.
#재실(齋室) 제관들의 휴식과 제수 장만 등을 하는 곳이에요.
#금천교(禁川橋)
재실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능의 입구가 보입니다.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가 있습니다. 금천교는 속세와 신성한 공간을 구분 짓는 것이라 하는데요 경복궁의 영제교 창덕궁의 금천교 창경궁의 옥천교와 같은 의미 인데요. 대궐의 금천교는 흐르는물에 마음을 깨끗히 씻고 드나든다는 의미가 있지만 능역의 금천교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의미가 있어요.

#홍살문(紅箭門) 이곳이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문이 있는데 이것이 홍살문 입니다.홍살문은 양쪽에 30자(9미터)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화살과 같은 나무를 박아 붉은 칠을한 한 문이에요.신성한 곳이니 잡귀는 법접하지 말라는 뜿이에요.3~4개의 살들이 좌우에 있고 태극문양이 가운데 있어요.
여기서부터 재향공간이에요.
#판위(版位)
홍살문 우측의 네모난 대리석은 '판위'라고 하며, 왕이 무덤을 참배하러 오면 이곳에서 먼저 무덤을 향해 절을4번 올린다고 합니다.
#️참도 : 홍살문을 지나면 '참도'라는 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높고 넓게, 오른쪽은 상대적으로 좁고 낮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왼쪽이 '신도'라 하여 혼령이 다니는 길이라 합니다.
오른쪽 낮은 길은 '어도'라 하여
왕이 다니는 길이에요.

#정자각(丁字閣)
중앙의 T자 형태의 건물이 능에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입니다.
정자각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에는 잡상을 얹었어요.

#신계(神階),와"어계(御階).
정자각 동쪽에는 2개의 계단이 있어요 일명 동계 에요. 왼쪽은 신령이 오르는 신계(神階)이고 오른쪽은 임금과 제관이 오르는어계(御階)에요.
임금이 선왕의 혼령을 모시고 동쪽 계단을 올라 정자각에서 제향을 드리면 혼령은 신로를 따라 능침에 오르고 임금은 서쪽계단으로 내려와 환궁길에 올랐어요. 이를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고 해요.

#수라간(水刺間)
왼편에 있는 건물은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 수라간이에요.
#수복방(守僕房)
능을 관리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기거 하던 곳이에요.
#비각(碑閣)
뒤편은 비각으로 무덤의 주인공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있는 곳이에요.
#예감(瘞坎). 정자각 좌측 뒷편의 능 아래에 있는데, 제사를 마치고, 축문이나 혼백을 불사르거나 묻기 위해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소전대(燒錢臺)
여기서 부터 능침공간
#무석인(武石人)
문석인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있음. 검을 들고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에요. 조선왕조에는 추존왕이 9분이 계세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조상 사도세자를 비롯해서 다섯분 참고로 추존왕 릉은 무석인이 없어요. 무인석은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간 왕들의 왕릉에만 있어요. 일반사대부 집안에서 무인석을 설치하면 역적으로 죽을수도 있어요.
#문석인(文石人)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두손으로 홀을 쥐고 있음. 홀은 지금으로 말하면 공책이에요. 왕이 무엇을 말하면 빨리빨리 적어야지요. 이것도 왕릉을 지키는 수호신이에요.
#석마(石馬)
무석인과 문석인 곁에 있네요.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것 같네요. 일종의 자가용이에요. 왕이 심부름 시키면 빨리 가야지요.
#장명등(長明燈)
묘역의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에요.잡귀가 불을 무서워 하기 때문에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해요. 왕조가 영원하라는 의미도 있어요.

#혼유석(魂遊石)
능앞에 놓인 사각형의 큰돌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리는 곳이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이곳은 혼령이 쉬는 곳이에요.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어요.

#망주석(望柱石)
봉분 좌우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혼령이 봉분을 찿는 표지의 구실을 한다는 설과 풍수적으로 음양의 조화기능을 한다는등 기능에 대하여 여러설이 있어요
#석호(石虎)
능침을 수호하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이에요. 맹수로 부터 능을 보호하기 위해 밖을보며 지키고 있어요
#석양(石羊)
망자의 명복을 빌며 악귀나 재앙의 칩입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설치했어요. 양은 선함을 의미하며.사악한것을 피한다는 뜿도 있어요.
#능상(陵上)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이에요.

#병풍석(屛風石)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밑에 병풍처럼 둘러세운 12개의 긴 네모형 돌이에요. 병풍석에는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을 해당방위에 맞게 양각했는데 모든 방위에서 침범하는 부정과잡귀를 몰아 내기 위해서 세웠어요 둘레석, 호석(護石)이라고도 해요
#난간석(欄干石)
병풍석 바깥으로 띠모양의 난간으로 둘러쌓인 석물 운주형의 죽석을 사각기둥의 석주가 받치고 12각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곡장(曲墻)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의 동.서.북 3면에 쌓은 담장
태조와 세조 인조를 제외한 조선 왕들의 첫 국사는 국장에서 시작되어 자신의 국장으로 마무리함이 통례였어요. 왕이 승하하면 계령이라는 국장 의식에 따라 병조는 도성 내에 있는 모든 군사들을 통솔하여 궁궐을 에워싸요.
예조는 국장에 관계되는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도성 내 해당 관청과 모든 관아에 빠짐없이 공문을 보내요. 이렇게 국장이 공포되면 조선 팔도에는 5일 동안 장이 서지 못하며 졸곡(승하 후 3개월이 걸린다.) 전까지 도살과 혼인을 금하는 등 애도의 마음으로 금지령을 지키라는 의미에요

각 지방의 모든 관원들은 공문을 받는 즉시 소복을 입고 관아에서 한양을 향해 애도와 함께 그날 관아에서 잠을 잘 것이며, 이튿날 이른 새벽에 상복 차림으로 통곡을 하면서 일단 계령 의식을 마치되 상복은 3일 동안 착용하고 조문에 임해요.단, 국경을 지키는 변방 지역에서는 곡소리를 내어서는 안돼요. 이러한 계령 속에서 국장을 진행할 임시 기구들이 이조를 중심으로 짜여지게 되요. 이조에서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을 설치하고 . .. .
정해요.
#빈전도감(殯殿都監)
승하한 임금의 옥체에 관한 지말한 직무를 맡는다. 소렴, 대렴 때에 필요한 수의와 홑이불 등 각종 물품들을 준비하는데, 1명의 당상관과 1명의 당하관으로 짜여지는 조금은 한가한 직무라 할 수 있다.
#국장도감(國葬都監)
관과 상여등에 해당되는 재궁, 거여 그리고 부장품들을 준비하며 주요 임무는 무엇보다도 궁궐에서 왕릉까지 이르는 발인 행렬을 책임지는 것이다. 구성 직책으로 예조판서와 호조판서 그리고 기술 관리청인 선공감과 네 명의 당하관에 기술직 관원을 두었다.

승하한 임금의 유해는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영침에 누워 통상 3개월에서 6개월을 기다려야 했어요. 왕릉의 생기를 받기 전에 부패되어서는 안 되기에 선공감은 공조의 주관으로 그 기간 유해 보관 장치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설빙이라 하였어요. 설빙은 빈소로 사용하는 방 가운데에 대나무 평상과 대나무 그물을 짜 유해를 모셔놓고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주위를 둘러쌓는 것이에요.이때 습기가 유해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미역을 시신위에 덮었어요. 수개월의 국장 기간 동안 미역은 산더미를 이루었고 폐기처분되어야 할 미역이 암암리 시중에서 싼값으로 팔렸기에 '국상 중 미역값' 이라는 속담을 낳기도 했어요.

#산릉도감(山陵都監)
왕릉 현장에서 토목공사, 석물 조성과 건축물 조영 등 가장 힘든 역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공조판서, 선공감, 당하관 두 명과 몇 명의 기술직 관원들로 열 명 안팎이 있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부역하는 인원은 건원릉의 경우 한 달 이상 6,000명(충청도 3,500명, 황해도 2,000명, 강원도 500명 징발)이 동원되었어요. 이렇게 설치된 빈전, 국장, 산릉도감의 우두머리들을 제조라 하여 빈전도감제조, 국장도강제조, 산릉도감제조라 칭하고 세 명의 제조들을 총괄 관장하는 총호사는 주로 좌의정이 맡았어요.